세라복의 역사 [3] ~ 5. 세라복의 뿌리
세라복 애호가 KunadonokamiAoi님의 글, '세라복의 역사'로 알아보는 세라복의 역사, 그 세번째
시간입니다.  

5. 세라복의 뿌리
6. 세라복과 당시의 사회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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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라복의 뿌리

조금 더 자세하게 알아보겠습니다.

후쿠오카 여학원 세라복의 원형은 당시 서구의 여성용 의상으로서, 긴조학원도 그 좋은 예 중 하나
입니다. 이 두 학교의 교복은 각각 칸사이 칼라(직선 옷깃), 나고야 칼라(대형 옷깃)의 시발점이
되며, 칸토 칼라(커브 옷깃)의 경우에는 여자 각슈인이 그 뿌리가 아닐까 합니다.

칸사이 칼라의 특징인 '큰 세일러 칼라과 넓은 앞 가리개'는 그 원형의 특징이 이어져 내려온 것인데,
반대로 칸토 칼라는 이미 해군제복 등으로 채택되어 사회적으로 알려져가던 세일러 복을 여성용으로
개량, 도입한 것이기 때문에 앞 가리개가 부착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그 외에 베스트나 점퍼 스커트의 역사도 아마 이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습니다만 그 기원을
입증하기에는 너무 종류가 많은데다, 지역마다의 보편성이나 그런 성향이 퍼지게 된 경위까지 언급하
기에는 자료가 너무나도 부족합니다. 그러한 난점을 제쳐놓고 이야기한다면, 저의 해석으로는 남성용
세일러 복에서 진화한 세라복은 아무래도 그 디자인상, 여성이 입을 때 안에 무엇인가 껴입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다면 베스트나 점퍼 스커트의 방향성이 설명됩니다.
(쇼와시대 초기의 아동소설「아베고베 이야기(사토 하치로)」는 몸과 마음이 바뀐 남매가 겪는 재미
있는 이야기인데 그 때문에 주인공들이 점퍼 스커트를 입는 장면이 나옵니다 -흐릿한 기억입니다만-)

지금은 화학 섬유로 만든 스타킹이 일반적입니다만, 당시에는 아직 나일론이라는 소재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그 시절의 스타킹은 비단으로 만들었습니다. 대미 수출품으로서 비단의 존재는 매우 중요
했고, 양잠은 일본의 중요 산업이었습니다. 그런 시대였기 때문에 비단 스타킹은 확실히 싸지는 않
았지만 입수하기는 쉬운 제품이었습니다. 하이레벨의 사립 여학교에서는 그 당시부터 이미 검은 스
타킹을 선호한 것 같습니다.

■세라복과 당시의 사회 배경

이 세라복이 채택된 계기를 살펴보면 '남존여비'의 시대 배경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세일러 복은
분명히 수병의 제복으로 정식 채택되었습니다만 사관이나 장교의 제복으로선 절대로 채택되지 않았
습니다. 즉, 세라복은 하급 병사의 옷이며 바꿔 말하면「피지배계급」의 옷입니다.

남존여비의 분위기가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남성용 옷(세일러 복)을 여학생의 옷으로 채택한다는
것은 단지 상식/비상식의 문제가 아니라 아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니다만, 세라복은
이미 해외에서는 아동복으로 정착한 상태였기에 그것을 여학생이 입는 교복으로 채택하는 데에는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세라복은 여학생의 교복으로 정착, 군복과는 전혀 별개로 오히려 군복이라는 이미지보다는
일반인들에게 '여학생 교복'으로서 친숙해졌습니다.

당시의 일본해군은 꽤 진취적 성향을 갖고 있지 않았나 합니다. 유럽의 세일러 복을 재빨리 도입한
것도 해군의 판단이었습니다. 항해사들에게는 철저히 영어교육을 시켰으며, 시대의 흐름을 읽고 항
공기나 항공 모함의 개발, 비축에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당시의 여학교와 해군의 관계는 이런 진취
적인 성향이 서로 맞닿아 있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짓궂게도 얼마 후 여학생들의 비극으로 몰아가는 한 요인이 됩니다. 시대가 곧 앞이
보이지 않는 암흑으로 돌진해 간 것입니다.

태평양 전쟁의 전황악화는 여학생 교복에도 그 불똥이 튀었습니다. (1942년 부인 표준옷 고안).
그에 따라, 스커트의 제작이 금지되어으며 옷감을 아끼기 위해 세라복의 칼라를「헤치마 칼라(ヘチ
マ衿:역주-샤워가운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얇고 긴 삼각형 형태의 옷깃)」로 자르는 학교까지
있었습니다. 여학생들은 매력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후줄그레한 디자인의 옷으로 전쟁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그것은 학생들을 전쟁에 이용하는 근로 동원, 즉 공장 노동에 동원하기 위한
전략이었습니다. 그리고 '히메유리'로 대표되는 오키나와의 학도.. 아니, 여학생들. 그녀들도
세라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세라복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슬픈 장면입니다.

* 역주 : 태평양 전쟁 말기, 미군의 오키나와 상륙작전이 시작되고 일제는 미군과의 전쟁을 위한
최후의 발악으로서 '오키나와 현립 제 1고등여학교'의 학생들 222명을 간호부대로 편입시킵니다.
그후 전투에서 계속 밀려 전면 포위된 그녀들은, 결국 동굴에서 전원 자결로 삶을 마감합니다.
(바로 그 자리에 지금 전쟁을 반성하고 평화를 기원하는 '히메유리의 탑'과 '히메유리 평화기원
자료관'이 서있습니다. 오키나와의 관광명소 중 한 곳이지요.)

그 후 전쟁이 끝나고 한동안은 물자가 부족해 교복을 제정할 수 없었던 학교가 대다수였습니다만
배급제를 거치고 난 1955년 무렵에는 거의 모든 학교가 다시 세라복을 입게 됩니다.

이후 평화로운 시대가 온 이후부터는 세라복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그 수가 점차 줄어 들어갔
습니다. 앞서 기술한 역사적인 배경이 그 원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과거를 가지고
있기에 우리는 그 역사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다음 세대로 확실히 이어나가야 하지 않을까, 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세라복에는 그러한 '시대의 산 증인'이라고 하는 역할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깃들어 있습니다. 또한 세라복이 마인드 컨드롤의 도구가 되는 날이 결코 다시는 오지
않기를, 저는 마음 속 깊이 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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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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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라복의 뿌리

조금 더 자세하게 알아보겠습니다.

후쿠오카 여학원 세라복의 원형은 당시 서구의 여성용 의상으로서, 긴조학원도 그 좋은 예 중 하나
입니다. 이 두 학교의 교복은 각각 칸사이 칼라(직선 옷깃), 나고야 칼라(대형 옷깃)의 시발점이
되며, 칸토 칼라(커브 옷깃)의 경우에는 여자 각슈인이 그 뿌리가 아닐까 합니다.

칸사이 칼라의 특징인 '큰 세일러 칼라과 넓은 앞 가리개'는 그 원형의 특징이 이어져 내려온 것인데,
반대로 칸토 칼라는 이미 해군제복 등으로 채택되어 사회적으로 알려져가던 세일러 복을 여성용으로
개량, 도입한 것이기 때문에 앞 가리개가 부착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그 외에 베스트나 점퍼 스커트의 역사도 아마 이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습니다만 그 기원을
입증하기에는 너무 종류가 많은데다, 지역마다의 보편성이나 그런 성향이 퍼지게 된 경위까지 언급하
기에는 자료가 너무나도 부족합니다. 그러한 난점을 제쳐놓고 이야기한다면, 저의 해석으로는 남성용
세일러 복에서 진화한 세라복은 아무래도 그 디자인상, 여성이 입을 때 안에 무엇인가 껴입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다면 베스트나 점퍼 스커트의 방향성이 설명됩니다.
(쇼와시대 초기의 아동소설「아베고베 이야기(사토 하치로)」는 몸과 마음이 바뀐 남매가 겪는 재미
있는 이야기인데 그 때문에 주인공들이 점퍼 스커트를 입는 장면이 나옵니다 -흐릿한 기억입니다만-)

지금은 화학 섬유로 만든 스타킹이 일반적입니다만, 당시에는 아직 나일론이라는 소재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그 시절의 스타킹은 비단으로 만들었습니다. 대미 수출품으로서 비단의 존재는 매우 중요
했고, 양잠은 일본의 중요 산업이었습니다. 그런 시대였기 때문에 비단 스타킹은 확실히 싸지는 않
았지만 입수하기는 쉬운 제품이었습니다. 하이레벨의 사립 여학교에서는 그 당시부터 이미 검은 스
타킹을 선호한 것 같습니다.

■세라복과 당시의 사회 배경

이 세라복이 채택된 계기를 살펴보면 '남존여비'의 시대 배경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세일러 복은
분명히 수병의 제복으로 정식 채택되었습니다만 사관이나 장교의 제복으로선 절대로 채택되지 않았
습니다. 즉, 세라복은 하급 병사의 옷이며 바꿔 말하면「피지배계급」의 옷입니다.

남존여비의 분위기가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남성용 옷(세일러 복)을 여학생의 옷으로 채택한다는
것은 단지 상식/비상식의 문제가 아니라 아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니다만, 세라복은
이미 해외에서는 아동복으로 정착한 상태였기에 그것을 여학생이 입는 교복으로 채택하는 데에는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세라복은 여학생의 교복으로 정착, 군복과는 전혀 별개로 오히려 군복이라는 이미지보다는
일반인들에게 '여학생 교복'으로서 친숙해졌습니다.

당시의 일본해군은 꽤 진취적 성향을 갖고 있지 않았나 합니다. 유럽의 세일러 복을 재빨리 도입한
것도 해군의 판단이었습니다. 항해사들에게는 철저히 영어교육을 시켰으며, 시대의 흐름을 읽고 항
공기나 항공 모함의 개발, 비축에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당시의 여학교와 해군의 관계는 이런 진취
적인 성향이 서로 맞닿아 있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짓궂게도 얼마 후 여학생들의 비극으로 몰아가는 한 요인이 됩니다. 시대가 곧 앞이
보이지 않는 암흑으로 돌진해 간 것입니다.

태평양 전쟁의 전황악화는 여학생 교복에도 그 불똥이 튀었습니다. (1942년 부인 표준옷 고안).
그에 따라, 스커트의 제작이 금지되어으며 옷감을 아끼기 위해 세라복의 칼라를「헤치마 칼라(ヘチ
マ衿:역주-샤워가운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얇고 긴 삼각형 형태의 옷깃)」로 자르는 학교까지
있었습니다. 여학생들은 매력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후줄그레한 디자인의 옷으로 전쟁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그것은 학생들을 전쟁에 이용하는 근로 동원, 즉 공장 노동에 동원하기 위한
전략이었습니다. 그리고 '히메유리'로 대표되는 오키나와의 학도.. 아니, 여학생들. 그녀들도
세라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세라복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슬픈 장면입니다.

* 역주 : 태평양 전쟁 말기, 미군의 오키나와 상륙작전이 시작되고 일제는 미군과의 전쟁을 위한
최후의 발악으로서 '오키나와 현립 제 1고등여학교'의 학생들 222명을 간호부대로 편입시킵니다.
그후 전투에서 계속 밀려 전면 포위된 그녀들은, 결국 동굴에서 전원 자결로 삶을 마감합니다.
(바로 그 자리에 지금 전쟁을 반성하고 평화를 기원하는 '히메유리의 탑'과 '히메유리 평화기원
자료관'이 서있습니다. 오키나와의 관광명소 중 한 곳이지요.)

그 후 전쟁이 끝나고 한동안은 물자가 부족해 교복을 제정할 수 없었던 학교가 대다수였습니다만
배급제를 거치고 난 1955년 무렵에는 거의 모든 학교가 다시 세라복을 입게 됩니다.

이후 평화로운 시대가 온 이후부터는 세라복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그 수가 점차 줄어 들어갔
습니다. 앞서 기술한 역사적인 배경이 그 원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과거를 가지고
있기에 우리는 그 역사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다음 세대로 확실히 이어나가야 하지 않을까, 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세라복에는 그러한 '시대의 산 증인'이라고 하는 역할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깃들어 있습니다. 또한 세라복이 마인드 컨드롤의 도구가 되는 날이 결코 다시는 오지
않기를, 저는 마음 속 깊이 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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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by 리라쨩 | 2006/01/22 16:10 | 칼럼 | 트랙백 | 덧글(5)
트랙백 주소 : http://newkoman.egloos.com/tb/1239203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Commented by 瑞菜 at 2006/01/22 23:00
해군병학교에서 2차 세계대전 시기에는 적성국 언어라고
영어도, 영미계 노래도 가르치지 않다가,
교장 이노우에 시게요시 제독이 우겨서 영어 교육을 시켰다 하더군요.
"영어 하나 제대로 못하는 항해자가 어디 말이나 될 소리냐."라면서요.
그나마 육군사관학교에서는 그나마도 안했답디다만...

당시 학교를 다니고 방적공장으로 보내지신 할머님 말씀으로는
옷감 많이 든다고 고름을 못 달게 하고 대신 금속도 아닌 나무 단추를 달게 했다 합디다.
Commented by 세실 at 2006/01/23 03:41
전쟁 이야기로 들어가면 결국 암울해지는 이야기가 됩니다...쩝..... 뭐.... 일본에서는 오키나와가 유일하게 전쟁의 참상을 격은 곳이긴 하지만요....

어쨌든 다음 이야기도 기대합니다~^^
Commented by 리라쨩 at 2006/01/24 15:18
瑞菜/ 말 그대로 악착같이 싸우던 일제니까요.
세실/ 전쟁은 모두에게 불행하지요.
Commented by 샬언니 at 2006/01/24 20:39
...관제묘의 제사 숫가락까지 총알 만든다고 가져가던 시절이니...불행하네요...
Commented by 리라쨩 at 2006/01/25 09:29
샬언니/ 네, 정말로 비참했겠지요. 진부하기까지 한 말이지만, 그런 의미에서 전쟁은 참
슬픈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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